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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SRUN

맘스런매거진

#엄마들이 보는 세상

엎지른 물처럼 어쩌다 서른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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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비가 자주 내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건 나뿐인가.
봄이면 봄비가, 여름이면 장맛비가, 가을엔 가을비가, 겨울에는 눈도 비도 아닌 진눈깨비가 꾸역꾸역 숙제를 제출하는 학생들처럼 잊지도 않고 찾아왔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봄비는 어땠는지, 여름에 장마철이 지나가기는 했는지, 낙엽이 흠뻑 젖을 만큼 가을비는 왔는지, 진눈깨비라고 느낄 만한 뭔가가 내리긴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다못해 여우비라도 좀 내리면 좋으련만 마음을 적실 만큼 충분한 비가 오지 않는다. 덕분에 몸을 씻다가 갑작스러운 단수를 경험한 사람처럼 찝찝하고 개운하지 않은 나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나는 그런 상태로 엉겁결에 서른을 맞았다.

1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손만 대면 물건을 망가트리거나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몸짓에도 주위에 있는 물건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연달아 했다. 기어코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툭 쳐서 넘어트렸다. 컵에 가득 담긴 물이 콸콸 쏟아졌다. 엎지른 물은 자연스럽게 흘러 테이블 끝으로 향했고, 바닥으로 뚝뚝 낙하했다.

당황하지 않고 나는 컵을 바로 세웠다. 걸레를 가져와 엎지른 물도 닦았다. 서른이 된 새해는 어젯밤 끝에 기워진 오늘의 낮일 뿐. 나의 일상은 어제처럼 오늘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서른이 이렇게 왔구나.’
걸레질을 하면서 서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나는 아주 조금 느긋해졌다. 10년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내 이십대가 마냥 즐겁고 신나기만 했다는 뜻은 아니다. ‘청춘’이라는 단어가 품은 눈부시고 짭짤한 아름다움이 위선적으로 느껴질 만큼 나는 내면의 소리와 세계와의 마찰 사이에서 서툴고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리고 진실로 내 몸과 영혼의 주인이 되었다.

서른은 실수처럼 왔다.
아직 삼십대가 될 준비는 되지 않았는데, 어른답지 못한 구석이 여전히 많은 것 같은데 나는 실수로 물을 쏟은것처럼 갑자기 삼십대가 되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흐릿한 유년기가 끝날 쯤 십대가 되었고, 학교와 집을 쳇바퀴처럼 오가다 이십대가 되었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상처 입다 삼십대가 되었다. 서른이 되었다는 걸 제대로 실감도 하지못하면서 엎지른 물을 초연하게 닦고 있는 내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완연한 봄을 기다리는 요즘 매일매일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다. 다시는 이십대 때의 첫사랑처럼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서른의 초입에서 나는 언제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진심을 다해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겼을 때 예전의 나는 관계를 분명하게 확정 짓고 싶어 조급해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한 지금 이 순간조차도 행복하고 소중하다. 매일 조금씩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일상은 이미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이다.

이십대 때는 초라하다고 느껴졌던 짝사랑의 감정이 더이상 하찮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른의 나는 마냥 기다리지도, 홀로 상상의 세계에 흠뻑 빠지지도 않는다.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매일 한 티스푼씩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사람이 즐거운 하루를 보냈으면 하고 바란다. 어떤 계산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 이 마음을 내 안에 다시 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랑도, 일도, 관계도 서툴렀던 이십대를 그만 보내주려고 한다. 설익은 사과처럼 떫고 저주에 걸린 것처럼 손길 닿는 곳마다 실수했던 그 시기가 있었기에 조금 느긋하고 여유를 가진 서른을 맞을 수 있었다. 삼십대에는 또 삼십대만의 새로운 고민거리가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오늘은 행복할 거다.
    
미안해, 실수로 널 쏟았어 replique montre de luxe
저자 정다연

출판 믹스커피

발매 2019.09.25.

스물과 서른 사이에서
방황하는 당신을 위한 이야기
누구나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지난날의 불안을 떨치고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 있다. 하지만 서른이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삶의 고난 앞에서 방황한다. 기자이자 작가인 저자는 이십대에 우울증을 겪었고, 실직을 경험했으며, 실연을 겪었다. 서른쯤 되면 멋진 어른이 되어 어떤 고민이든 척척 다 해결할 줄 알았는데, 삼십대가 되어서도 삶의 아픔과 불안은 멈추지 않았다. 저자는 이십대의 아픔과 서른쯤에 겪는 내면의 변화는 이상한 일이거나 누군가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음으로써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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